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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

[후기] 17기 씨티-경희 NGO 인턴십 _ 모자

 

함께한다는 믿음으로!

- 6주간의 씨티-경희대 NGO 인턴십을 마무리하며-

 

 

안녕하세요, 씨티-경희대 NGO 인턴십을 통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근무하였던 인턴 모자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비비며 상담소로 출근했던 것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개강을 앞두고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6주간의 소회를 적어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였습니다. 제가 처한 상황과 주변의 현실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는 데서 오던 기쁨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당시, 저는 학업과 하고 싶은 활동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굳게 다짐했습니다. 대학생이 된다면 마음껏 활동을 펼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습니다. 점점 성평등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지고,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페미니즘 동아리뿐 아니라 여러 대학생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막막함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 간의 느슨한 연결이 절실했습니다. NGO 인턴십은 그렇게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6주간 인턴으로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업무, 운영방식, 활동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근무 첫날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소개받는 OT가 있었습니다. 먼저, 상담소의 공간들을 구석구석 둘러보았습니다. 강의나 회의를 위한 이안젤라홀부터 상담소의 식사를 책임지는 부엌 공간까지 다양했습니다. 특히, 상담소 곳곳에 위치한 책장들에서 상담소의 역사를 예증하는 기록들과 다양한 서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다음으로는, 3가지 키워드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키워드를 정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도전하는 것을 즐기고 여성학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꼽아보았습니다. 이후에는 별칭을 정하였습니다. 상담소의 중요한 특징은 활동가의 이름 대신 별칭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분위기를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활동하는 동안 모두를 각자의 별칭으로 호명하였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분위기에서 존중받는다는 점이 여실히 느껴져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별칭의 이유를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입밖에 <모자>를 내뱉는 순간부터 제가 설정한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이, 상담소라는 공간 안에서 <모자>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상담소를 구성하고 있는 5개의 부서 중 여성주의상담팀, 성문화운동팀, 회원홍보팀, 열림터, 사무국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성주의상담팀에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명칭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업무인 상담에 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단순한 상담과 다르게 여성주의 상담은 여성주의 철학에 따라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권력 강화를 조력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상담이었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성폭력 경험을 특정 개인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바라본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성문화운동팀은 성문화 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개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2022년에는 적극적 합의에 초점을 맞추어 사업을 추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적극적 합의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명시적으로, 의식이 있을 때, 충분한 정보와 이해를 바탕으로, 평등하게, 모든 과정에서, 항상” 합의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폭력뿐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호받아야 하는 성관계, 아주 사소하게는 일상생활에서의 대화까지 모든 면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활동가님께서는 PPT와 영상자료를 적극 활용하면서 열정적으로 활동에 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나누어주신 책자들은 굉장히 유익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여러 책자 중 적극적 합의에 관한 강의내용을 담은 <동의X동의, 적극적 합의>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결혼관계에서도 반드시 적극적 합의가 필요하며 그것이 단순히 질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적극적 합의를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어준 책이었습니다.

 

2022년에 새롭게 신설된 회원홍보팀은 여러 고민을 기반으로 체계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상담소는 회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기에, 회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 2회 나눔터를 발간하여 우편발송하는 사업 또한 꾸준히 진행중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매달 소식지 <뛴다! 상담소>를 발송하여 회원들이 상담소의 활동과 후원금의 쓰임 현황을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상담소가 회원홍보팀을 매개로 회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생활인이 머무는 공간인 열림터를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생활인들의 생활을 편안히 하고 퇴소자를 지원하는 데 힘쓰고 있었습니다. 성인권교육 등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상담소에서는 다시 보자는 의미를 담아 퇴소자를 ‘또우리’라고 칭하며 지속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물품을 지원했고, 또우리와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무국에서는 상담소의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종일 진행되었던 교육을 통해 상담소의 활동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인턴으로 맡은 가장 주요한 두 가지 업무는 제32차 정기총회 준비와 제1582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기획 및 진행이었습니다. 그중 1월에는 정기총회 준비에 더 주력했습니다. 먼저, 정기총회 당일 참석자들에게 제공될 자료집에 수록될 자료들을 정리하였습니다. 2022년 상담소 블로그 포스트 목록 정리, 라이브 스트리밍을 포함한 유튜브 동영상 목록 정리, 입장/논평/성명 정리, 외부 강의 활동 정리, 언론보도 정리 등이 있었습니다. 연님과 분량을 나누어 진행했음에도, 양이 워낙 많아 하루를 꼬박 투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로 제목과 참여활동가, 일자 등을 정리하는 것으로 단순 업무였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습니다. 먼저, 전날 있었던 OT 교육과 연결 지으며 상담소의 활동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언론보도의 경우 상담소가 실린 1년 치의 기사들을 정리하면서 가시적으로 상담소의 활동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성 의제의 변화도 알 수 있었습니다. 대선 전에는 여성가족부 폐지나 후보 공약에 관한 활동 및 논평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대선 후에는 친족성폭력 관련 법의 개정을 촉구하는 활동이 이어졌다는 점이 그 예입니다.

 

다음으로, 정회원 우편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상담소를 후원하고 있는 회원들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정보를 검토하였습니다. 이후 안내서류를 포장하고, 직접 우체국에 방문하여 우편을 부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정기총회에 사용될 PPT를 제작하였습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열과 성을 다하였던 작업입니다. 가장 중요한 디자인을 고를 때에는 연님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PPT는 총회의 전반적인 내용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지만, 가장 주가 되었던 것은 2022년 활동보고와 2023년 활동계획 발표였습니다. 팀별로 제공해주신 자료를 PPT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수평적 관계 유지 및 마음돌봄 등 1년간 주력해온 활동과 앞으로의 목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감사패, 공로상 수상, 임원선출을 위한 페이지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약 110장가량의 PPT를 완성한 이후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제32차 정기총회는 3년 만에 대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설렘과 긴장이 상담소 안에 감도는 순간이었습니다. 상담소에서는 6개의 테이블에 키워드를 선택하여 앉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담소에 처음 오는 회원, 집에서 상담소까지 1시간 30분 이상 걸리는 회원, 비거니즘을 실천 중인 회원, 몸 움직임을 좋아하는 회원, 낯을 많이 가리는 회원 등. 또한, 각 자리에서 대화가 활발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상담소 활동가 1분씩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회원들의 활발한 소통을 위해 애쓰시는 것을 보면서 상담소가 후원회원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방식, 나아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도착하시는 분들이 어디에 앉는지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이날 총회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준비해둔 의자가 부족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인턴들 또한 바빠졌습니다. 총회에서 인턴의 담당업무는 2가지가 있었는데, 명찰을 배부하는 일과 활동가님과 함께 주위를 돌아다니며 회원들을 간단하게 인터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자를 맡았습니다. 성함을 듣고 명찰을 찾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얼른 더 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워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상담소에서는 회원들이 챙겨갈 수 있는 스티커, 굿즈, 책 등을 모아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두어야 좋을지 열띤 회의가 오갔던 만큼 회원분들이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다 뿌듯해지곤 했습니다. 이처럼 총회 곳곳에는 활동가들의 배려와 애정이 묻어 있었습니다.

 

상담소를 방문해주신 회원분들은 정말 다양했습니다. 매년 이 자리에 참석하시는 분도, 오늘 처음 오시는 분도 있었고 상담소의 활동가였던 분도, 심지어는 씨티-경희대 인턴으로 활동했던 분도 계셨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총회의 식순이 진행될 때마다 회원들은 힘찬 박수로 환호해주었습니다. 웃음이 가득한 자리였습니다. 총회를 마치며, ‘명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하고,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턴생활을 하면서 종종 회계를 담당하시는 활동가님의 일을 보조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결의서철 검수가 그 예입니다. 이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수입과 지출이 담겨있는 결의서들이 알맞은 순서로 분류되어 있는지 검토한 후 하나로 묶어 서철로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힘들었지만 직접 결의서를 본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비영리단체로서 상담소의 지출과 수입에 관한 대략적인 감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출과 수입의 요소가 세분화하여 정리되어 있다는 점도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이외에도 문서대장을 정리했습니다. 저희는 상담소가 1년 동안 받았던 공문서들의 제목과 기관을 정리하고, 날짜에 맞게 배열했습니다. 구청이나 시청이 개별 단체에 보내는 공문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5주 차에는 인턴을 담당하고 계시는 활동가님께서 저희를 대상으로 ‘비즈니스 메일 작성법 및 예산관리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교육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수요시위 사례를 중심으로 비즈니스 메일을 작성하는 방식에 관해 알려주셨습니다. 수요시위를 기획하고 피켓, 포스터 등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정의기억연대와의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주로 메일을 통해서 정보가 공유되었기에, 여러 차례 메일이 오고 갔습니다. 이를 예시로 활동가님께서는 메일 제목 설정 방법이나 안건사항 전달 방법 등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외에도 참조와 숨은 참조의 차이점, 재답장 시에 메일 작성 방법에 관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상담소의 개별 활동가들이 다른 단체와 협력함에 있어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산 관리 방식에 관한 교육이었습니다. 회원홍보팀의 예산 관리 방식을 예시로 모든 항목을 빠지지 않고 꼼꼼히 예산 및 지출을 정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영수증을 포함한 결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만큼 엑셀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가지의 교육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귀중한 배움이었고 몹시 유익했습니다.


상담소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아침나눔>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까먹은 적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불현듯 시계를 보면 10시 55분인 신기한 경험도 하곤 했습니다. 6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던 아침나눔은 인턴들에게 적응과 이해를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침나눔은 전날 일정의 공유로 시작되었습니다. 전날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공유하고, 특정한 행사나 인터뷰, 활동에 참여하였다면 소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연대단체와의 활동이나 사업 등이 다루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함께 협업해서 진행하고 있는지, 어떤 것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당일의 일정에 관해 공유했습니다.

 

꼭 일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가볍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상담소를 방문했던 날의 아침나눔에서는 각자 한 해 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에 관해 공유했습니다. 2022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이반지하의 <안지워지지>에 착안한 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고, 저 또한 ‘밀리지 않고 다이어리 쓰기’라는 사소한 목표이자 일상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웃음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인턴으로서 마주하는 상담소 활동가들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활동가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어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10분 남짓의 짧은 시간이더라도 꼭 다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의미 있게 느껴졌습니다.


상담소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법에 관한 인식입니다. 이전에는 법을 제 삶과 분리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인권을 다룸에 있어서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선고공판 참여를 통해 우리는 언제든 법과 닿아 있으며 그만큼 관심을 가져야 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선고공판 때에는 법원에 가는 것도, 공판을 참관하는 것도 처음이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점심을 일찍 먹고 다 함께 법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공판 결과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웅장했고, 어딘가 엄숙함이 감돌았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곳으로 향하니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채 감옥으로 연행되는 사람도,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변호사도, PRESS 명찰을 찬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공판은 1시간 이상 지연되었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기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공판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만 보았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저희는 일반석에 한 줄로 앉았습니다. 장내를 정리하고 피고인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판사는 조목조목 판결이 도출되게 된 근거를 설명했습니다. 아쉬운 부분은 분명 존재했지만, 원심의 형이 유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판결에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야 하냐며 고함을 쳤습니다. 판사는 쫓겨나는 피고인에게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겁니다.” 한 마디였지만, 판사가 해당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다행스러움을 느꼈습니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겨우 10분 남짓한 판결을 듣고 돌아서니 묘한 기분이 감돌았습니다. 이 10분을 위해 피해자는 그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고생하셨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의 앞으로의 삶이 순탄하기를 바랐습니다. 덧붙여, 법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판 과정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설명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선고공판은 인턴 마지막 날에 있었습니다. 해당 사건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하였고, 오랜 시간 동안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활동가님이 떨리는 마음으로 법원에 향하였고, 저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인턴 생활의 마지막이다 보니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번 사건은 파기환송심으로, 대법원에서 지방법원에 재판단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재판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였고 공판장에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은 후 이전에 진행되는 사건들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해당 법정이 크게 4가지 요소로 감형을 선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초범이라는 점,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한 경우, 피고인이 원고와 일정한 금액을 ‘공탁’한 경우가 그것입니다.

 

한차례 사건들이 끝나고, 드디어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자리로 향하였고,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뒤덮여 있었고,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졌기에 저 또한 강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먼저, 해당 사건이 어떤 경위를 거쳐 법정에 오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었습니다. 원심에서는 유죄가 판결되었으나 항소심 과정에서 피고인이 사실오인 및 법리오인과 양형부당을 주장했고, 이가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폭행과 고의를 인정하며 환송파기를 결정하였습니다.

 

항소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가해자가 재판과정에 피해자에게 정신질환이 있으며 이에 따라 사건이 꾸며진 것이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사는 사건의 ‘주요부분’에 관해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적이라 판단했고, 특별히 비합리적이거나 모순되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증인들의 구체적인 진술을 보았을 때 피해자의 진술이 증빙될 수 있다고도 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사실오인과 관련된 피고인의 주장 인정 여부에 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신체 접촉이었다는 주장이나 피고인의 무고 의도에서 기인한 허위 고소라는 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폭행 및 고의에 관해서는 성폭력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피해자가 초급 장교였기 때문에 고위 장교인 가해자에게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피고인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하게 곤란하게 했다는 근거로 인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피해자가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성폭력 사실의 인과관계에 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특히 주요하였는데, 강간죄는 이미 공소시효가 만기되었다는 점에서 피고인의 범행 사실이 인정되지만,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는다면 피고인을 처벌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신청되었던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한 신빙성이 인정되었습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연극성 인격 장애’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겪은 피해사실이 심각한 외상경험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양형부당의 요소와 관해서는 지위관계에 따른 절대복종이 요구되었다는 점이 인정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원심이었던 유죄 판결이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피고인이 8년 형을 선고받게 된 것입니다. 선고 직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피해자와 피고인의 측근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피고인이 억울하다는 것도, 당당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에나마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점이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피해자가 이 판결로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습니다.

 

판결이 끝난 후에는 예정되었던 기자회견이 법원의 동문 앞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외에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녹색당, 젊은여군포럼, 진보당 등의 인사가 참여했습니다. 저는 연님과 함께 플랜카드를 들고 연대하였습니다. 연대발언을 들으면서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이후 법원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습니다.

 

재판과 기자회견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군대 내 성소수자 차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군대 내에는 너무나도 쉽고 당연하게 자행되는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차별이 묵인되는 이상 군대와 같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범죄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군대가 안전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인턴생활로 함께했던 2번의 재판과정을 통해서 법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법은 저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고 또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성폭력에 관해서는 필수적으로 재판이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법과 권리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수요시위 기획과 진행을 통해서는 변화에 대한 믿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요시위 기획을 위한 첫 단계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답사였습니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자료조사를 구체화하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전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던 ‘위안소’에 관해 적나라한 기록과 사진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권이 참혹하게 유린당하였던 현장을 보는 것은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전시를 따라가면서 점점 전혀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피해생존자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절망감이나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희망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요시위 자료 영상이 틀어지고 있는 화면 앞에서는 그 마음이 온전하게 느껴져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전시의 후반부에는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생존자가 피해를 입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연도별로 적혀 있었습니다. 모두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고, 심지어는 차별 섞인 시선과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2015년에는 졸속으로 한일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생존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말하고, 사과를 요구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배경으로 나오는 <아리랑> 노래와 함께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제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들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더 크게 외치며 나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수요시위 기획을 통해서 이 마음과 다짐을 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은 노란 나비 모형에 글을 써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마음이 복합적으로 들어 쉬이 문구를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전시를 마친 후 가장 크게 남았던 ‘연대의 마음’을 적고 싶었고, 언제까지나 연대하겠다는 다짐을 적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답사차 수요시위를 방문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떨리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시위는 12시 정각에 시작되었습니다. 여는 노래인 <바위처럼>을 듣자,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며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있으니 그새 슬픔은 잊혔습니다. 저 또한 소리를 크게 높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요시위에서는 재판 과정에 참여하셨던 두 분의 변호사께서 연대발언을 해주셨습니다. 생생한 경험담을 들으니 기분이 새로웠고, 오랜 기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주셨다는 점에서 큰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시위를 보면서 수요시위의 소중함을 느꼈습니다. 혐오 세력에 굴하지 않고 매주 꾸준히 ‘정식사죄’를 요구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두 차례의 답사를 마친 이후 각자 소감문을 공유하였습니다. 이후 진행되었던 기획 회의에서는 시위의 전반적인 주제를 선정하는 것에 주력하였습니다. 소감문에서 공통으로 언급되었던 내용들을 기반으로 토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시위를 기획하는 것은 처음이다 보니 주제를 선정함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한 결과, ‘1582번의 수요일,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라는 주제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피켓과 포스터를 제작하였습니다. 저는 피켓을 담당하였습니다.

 

문화공연은 가장 오랜 시간 논의하였던 것이고, 가장 크게 아쉬움이 남은 것이기도 합니다. 참여형 문화공연을 진행해보자는 목표로 클래퍼를 활용한 응원이나 참여자의 발표, 공연 등 다양한 방식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한계로 인해 모두 실현되지 못했고 문화공연을 생략하는 방안이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가장 큰 주축이 빠진 상황에서, 너무나도 큰 아쉬움이 들었고 수요시위를 잘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수요시위는 매주 빠짐없이 진행되는 것이지만, 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아쉬움 또한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여 준비를 이어 나갔습니다. 수요시위의 마지막 단계는 <바위처럼>에 맞춰 피켓을 활용한 동작을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문화공연 대신 <바위처럼>이 나올 때 간단하게 따라 할 수 있도록 동작을 만들어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연님과 고민을 거듭한 결과 동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날에는 상담소 활동가분들이 <바위처럼> 율동을 연습하시는 틈에 함께 피켓 동작을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시위가 드디어 내일이라고 생각하니, 기대되면서도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몇 주간 지속되었던 수요시위 준비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시위 당일이 되었습니다. 상담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대본을, 연님은 발언문을 여러 번 읽어보며 입에 익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연습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나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편안한 옷차림이던 활동가님들이 모두 외출을 위해 패딩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웃기게도, 그 모습을 보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나눔을 마치고 다 같이 수요시위 현장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장소에 도착한 후 저는 정의기억연대가 쓰여진 옷을 입고 대기하였습니다. 대본을 반복해서 보는데도 머리에 들어가는 것 같지 않은, 극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유튜브 생방송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웠습니다. 이윽고 정시가 되자 저는 스탠바이 후 마이크를 들고 트럭에 올랐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순간 떨림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은 하얘졌지만, 떨림은 멈춘 상태에서 준비해왔던 식순을 하나씩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앞자리에 상담소 활동가들이 앉아 환호를 보내주셨기 때문에 더욱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트럭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수차례 반복하였습니다. 수요시위가 진행되는 와중에 두 차례 헤프닝이 있기도 했습니다. 혐오시위를 하고 있던 한 남자가 시위 현장에 찾아와 혐오 발언을 쏟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제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당당하게 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분노한 저는 무대 위로 올라가 구호 외칠 것을 제안했습니다. 들어가기 전까지 높낮이나 말투 등 고민투성이였는데, 막상 올라가니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요시위는 끝이 났습니다. 자잘한 실수들이 너무나 아쉽고 속상했지만,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에 후련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활동가님이 시위가 끝난 이후 저를 칭찬하고 다독여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수요시위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찬찬히 상황을 복기해보니 크게 느껴지는 바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요시위의 문구가 가진 힘이었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우리가 변화를 만든다.’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 만들어낸 문구였지만, 그 문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또 구호를 선창하면서 오히려 제가 힘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문구는 제가 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던 것입니다. 학내 페미니즘 활동을 지속하면서 무력감을 느끼거나 두려운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주변에 제가 페미니즘 활동을 한다는 것을 숨긴 경우도 많습니다. 혐오와 마주하기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대한 회의도 들었습니다. '과연 변하기는 할까?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위과정에서 그렇지 않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 동시에 변화하고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시위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시는 분들을 보며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소중한 것은 연대였습니다. 피해생존자들이 그러했듯이, 희망을 품고 연대하면서 변화를 외치다 보면 언젠가 변화와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되새기면서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꾸준히 연대를 외치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인턴 생활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상담소에서 인턴을 함께했던 연님입니다. 함께라 6주라는 시간을 더 잘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는, 상담소의 활동가님들입니다. 많이 대화하지는 못했지만 역시 6주를 함께하면서 인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희를 담당해주셨던 산님과는 자주 대화도 나누면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두 인연은 제가 인턴 생활에서 얻어낸 가장 큰 수확입니다.

 

저는 이제 다시 캠퍼스로 돌아갑니다. 앞으로도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러 한계나 어려움에 부딪히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남아있는 기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턴 생활이 선물해준 소중한 6주의 기억을 품으며 열심히 달려 나가겠습니다. 함께해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