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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해서

성폭력의 맥락 - 성폭력은 왜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성폭력은 매우 비일상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한 개인에게 있어서 성폭력의 피해는 그와 같은 경험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 집단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폭력 발생 원인을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찾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체화 하고 있는 성차별적 성별 이중 규범과 우리 사회의 성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로부터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고 생물학적 성에 맞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즉, 여성은 여성성을, 남성은 남성성을 획득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교육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sex, gender, sexuality)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 구도 안에서만 존재하며 이러한 규범은 다양한 개인들의 성적 정체성과 지향, 행동 양식 등을 규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성은 여성으로 남성은 남성으로 길러진다는 것은‘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고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남성, 여성성/남성성은 사실상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일 뿐 아니라, 차별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자답다’, ‘여성스럽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남성은 역동적, 공격적, 지배적인 성향으로, 여성은 수동적, 종속적인 성향으로 매우 상반된 내용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성)과 대응할 수 없도록 길들여진 여성(성)의 관계는 폭력적인 일방의 침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생물학적인 차이에 기인한다기보다 사회적인 성별 규범 체계의 학습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인 양 기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성향에 대해 사회적 가치는 다르게 매겨지며 남성과 다르게 훈육되어온 여성의 몸과 생각, 행동은 남성이 여성을 보호/통제하는 기반이 됩니다. 이와 같이 상호비대칭적인 성별 관계의 모순이 바로‘성폭력'이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이와 같은 차별적인 요소는 성에 대한 가치관이나 성적 실천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남성에게 ‘성’은 당연 히 향유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남성은 너무나 쉽게 성적 주체가 되지만, 여성에게 성은 부끄럽고 위험한 것으로 학습되기 때문에 여성이 성적 주체성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성적 주체자인 남성에게는 성적 실천을 위한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을 뿐 아니라 성적 실천이 곧 남성성을 획득하고 강화하는 핵심이 됩니다. 즉, 성적 농담과 포르노, 성매매 등 남성들이 향유하는 성문화는 남성들의 유희와 쾌락인 동시에 남성이 되기 위한 관문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여성을 도구화하고 지배하는 성적 실천은 남성 집단의 공모와 연대로 계속 유지됩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중심 성문화는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확산, 여성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고 옷차림과 행동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남성들의 성적 실천 방식을 문제 삼는 대신 성폭력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몸의 위험과 취약함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회 규범은 여성은 성에서 수동적이고 무지해야 하며 남성은 여성을 리드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남성들의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이 남성다움이나 낭만으로 포장되고 여성들의 거부가 내숭이나 ‘여성스러움’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문화에서 성폭력의 문제는 은폐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남성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성폭력은 단지 성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고 믿는 사회에서 ‘강간’은 언제든지 ‘화간’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성폭력이 대부분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차별적 섹슈얼리티와 연결되어 있는 한편 다른 사회적 권력 관계와도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 실제로 일어나는 많은 성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이는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수단으로 성폭력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

남성 - 여성 , 연장자 - 연소자 , 상사 - 부하직원 , 비장애인 - 장애인 , 내국인 - 이주노동자 등의 관계에서 ‘누가 누구에게 성폭력을 행하는가'를 살펴보면 권력의 작동 방향과 성폭력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남성 간 성폭력 역시 위계를 동반하여 일어난다는 점을 상기할 때 , 권력 관계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특히 우리는 수직적인 상하관계와 위계가 강한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 가족 , 직장 , 군대 등에서 개인의 관계는 서열화되고 조직 내에서 지배와 순응을 내면화하도록 교육받습니다 . 이러한 위치에 있는 개인들은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수평적 관계를 맺기 어려우며 성폭력이 발생하였을 때 피해자가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것은 성폭력이 바로 이러한 위계 관계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

성폭력은 일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일탈적인 행동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 성문화를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함에 있어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은 , 이렇듯 성폭력이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 성차별적 성별 구조와 성문화 , 그리고 위계적인 권력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와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를 직시할 때 , 우리에게 새로운 실천 전략이 생길 거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