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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해서/[나눔터] 생존자의 목소리

나눔터 88호 <생존자의 목소리> 그 집을 지날 때마다 - 선이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담당 성문화운동팀 메일 (f.culture@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 안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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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을 지날 때마다

 

선이

 

오랫동안 혼자 집에 있다 보면 가끔 과거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화가 날 때가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 나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던 당시 중학생으로 기억되는 슈퍼집 놈의 집이 우리 집과 가까웠는데 그 집을 지날 때마다 화가 점점 더 크게 밀려오는 것이다. 서울 살 때는 생각도 잘 안 났는데 몇 개월 전부터 고향 집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고 나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나고 화가 치밀었다. 벌써 20년도 넘었지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새끼는 가정도 이루고 잘 살고 있겠지? 그놈의 부모는 가끔 보인다. 못 보던 차가 그 집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는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싶다거나 빨간 라커로 아동성폭력범죄자라고 크게 써 놓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내가 진짜 이 새끼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분노가 올라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안으로 곪아서 우울증에 걸리는 것보다 한 번씩 폭발시키는 게 정신 건강에는 더 나은 것 같다. 그리고 뭐든 오래 묵혀 둘수록 안 좋다. 편지까지 썼다. 내가 바라는 건 진정 어린 사과와 나와 같은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것. 하지만 상담사님은 편지를 전해도 기억 안 난다고 발뺌하거나 사과받지 못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내가 또 상처받을 수도 있다고 해서 전달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작 상처를 준 쪽은 잘 기억을 못 한다. 복수를 해봤자 범죄자가 되어 감옥 가게 될까 봐 싫고,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신에게든 누구에게든 그냥 그에 응당한 벌을 받았을 거라 믿는다.

어린 시절, 그날은 쌍둥이 여동생과 라면을 사러 슈퍼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라면 두 봉지인가 세 봉지를 사 들고 함께 언덕 넘어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주는 눈빛부터 이상했는데 그 슈퍼집 놈이 우리 뒤를 쫓아왔다. 우리는 뭔가 공포를 느꼈고 마구 도망을 쳤다. 언덕에서 갑자기 그놈이 동생 이름과 내 이름을 큰소리로 다급하게 여러 번 불렀다. 나는 멈칫했다. 그때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 몰랐다. 계속해서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동생은 그대로 도망쳤고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내키지는 않지만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 그때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나도 동생처럼 그냥 도망칠걸. 타임머신이 발명되면 큰돈을 주고서라도 돌아오고 싶은 순간이다. 이름을 부르니까 혹시나 급한 일인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선한 마음을 냈던 것이 너무 후회됐다. 언덕 바위 뒤쪽에서 성폭력을 당했고 근처에는 크게 소리를 질렀으면 나를 도와줄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는 말에 나는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동생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만 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필름이 끊긴 듯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그 기억을 무의식 저편으로 묻어 두었다.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난 것은 학교폭력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잘나가는 무리들에게 찍혀서 매일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 가는 것이 너무 괴롭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했다. 혼자 극복하기 위해 일기를 썼는데, 그때 갑자기 어렸을 때 성폭력 당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어서 미칠 것 같았다. 일기장 몇 권이나 채울 정도로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언제는 한번 중학교 때 성폭력 전문 강사가 찾아와 모두 눈을 감고 성폭력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이분이 과연 나를 도와줄까? 라는 기대로 손을 들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끝내 손을 들지 못했다. 믿을 수 있는 어른은 없었다. 내가 학교폭력을 당할 때도 담임선생님은 알고도 묵인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나는 대학교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열심히 공부하며 자가치유를 해나갔고 스물세 살쯤 되던 해에 드디어 동생에게 이 일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대학교에서 오랜만에 고향 집으로 돌아와 동생을 만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 일을 털어놓았다. 말할 때 몸이 긴장되고 떨렸다. 동생은 같이 화내주며 나를 이해해주었다. “왜 이제 얘기했어?”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 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혼자 도망간 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미안해했다. “아니야. 너가 왜 미안해. 너도 어렸잖아. 너라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상담을 받았던 성폭력센터 선생님도 동생이라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그 말을 들을 때 분노의 마음이 조금 느껴졌다. 나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이라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이 짜증났다. 사실 내 맘속 한구석에는 그 당시 나를 구하러 와주지 않은 동생에 대한 원망도 조금은 있었다. 아니다. 그래도 나는 동생이 당하지 않은 것이 훨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동생도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동생이라도 도망쳐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 후로 몇 년이 지나고 동생도 어린 시절 아빠의 친구에게 당했던 성폭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정말 화가 나고 슬펐다. 난 지금 서른두 살이고 지금은 더욱 마음이 강해져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해자들은 잘 살겠지만 피해자들은 정말 너무나 오랜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그 시간들이 아깝고 그래서 더욱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것 같다.

성폭력센터 선생님은 가해자에게 느끼는 분노 이외에 가족들에게 느끼는 분노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어렸고 그때 부모님은 매우 엄하고 자주 동생과 나를 혼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가 비난받거나 혼날까 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사실을 말하면 혼날 것 같았고 무시당하면 너무 괴롭고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이제는 스스로 내면의 힘을 키웠다. 나는 이제 그놈과 대적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 가는 길 그 슈퍼를 지날 때마다 잔뜩 긴장하고 주먹을 꼭 쥔 채 걸어 다녔던 어린 소녀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그 소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안전해. 어떤 상황에서라도 내가 꼭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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