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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생존자와 함께한 대담한 도전: 20주년 특집

성폭력 가해자 무죄 입증은 피해자 역고소로?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2011. 6. 2. 20:54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성폭력에 맞선 2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본 기사는 [성폭력 당한 것도 억울한데, 내가 피의자라니]라는 제목으로 6월 2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해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에서 '성희롱 발언'으로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이 모욕죄와 무고죄로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강용석 의원은 한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하는데 아나운서를 할 수 있겠느냐"라는 발언을 해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지난 25일 재판부는 발언의 영향력이 막강한 현직 국회의원이 모든 아나운서들이 그런 것처럼 말을 함으로써 공중파 아나운서 전체에 모욕을 줬다고 인정하였다. 또한 재판부는 강용석 의원이 거짓 기사를 썼다며 해당 기자를 고소했다가 검찰에 무고죄로 기소된 부분에 대해서도 혐의를 인정했다. 

강용석 의원은 끝까지 자신의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무리수를 두다가 오히려 자신이 무고죄로 당한 셈이다. 그러나 이렇듯 성폭력 가해자의 거짓말이 밝혀져서 가해자가 무고혐의로 기소되는 현상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성폭력 가해자들이 용기있게 피해 사실을 밝힌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지원하던 대책위원회나 성폭력상담소, 성폭력 사건을 보도했던 기자들마저 명예훼손으로 줄줄이 기소되곤 했다. 가해자들의 명예훼손 역고소는 당시 사회적으로 터져나오는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다

 

  
2003년 8월 29일. '성폭력 역고소 공대위 대구특위' 주최 <성폭력 가해자에 의한 대구 명예훼손 재판 분석토론회>
ⓒ 오마이뉴스

 

 

199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반성폭력운동'은 보다 적극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시도하였다. 그동안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성폭력 사실에 대해 '피해자의 개인적인 치부나 비밀'로 묻어두기를 강요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로 시작된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공개운동은 성폭력을 은폐하는 사회적 관행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폭력은 피해자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성폭력을 조장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이런 구조적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00인위원회'는 '성폭력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드러내고 반성을 촉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은폐되었던 성폭력 사건과 해당 가해자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는 곧바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역고소하는 가해자들의 반격 때문에 주춤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성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지원하는 대책위원회나 상담소, 지지자들까지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했으며, 심지어는 해당 성폭력 사건을 보도한 기자들까지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였다.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토론회(2002년 10월 22일, 민변 여성위원회, 성폭력가해자 역고소 대책회의,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 공동주최)에서 사례 발표를 했던 성차별판결 모니터링 모임 소속 장임다혜에 따르면, 당시 성폭력 가해자에 의한 명예훼손 역고소 사례는 무려 15건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성희롱을 문제제기했던 서울대 교수 성희롱사건에서도 피해자는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당했을 뿐만 아니라, KBS 노조 간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 제주 도지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 원광대 교수 성폭력 사건, 죽암휴게소 성폭력 사건, 소설가 성폭력 사건, 동국대 교수 성폭력 사건, 대구시립합창단 성폭력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었던 많은 사건들의 피해자들이 '명예훼손'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죽암휴게소 성폭력 사건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바람에,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구속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후 이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운동단체 등 공동대책위원회의 지원으로 보석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경북 경산 K대 교수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도 피해자를 지원한 대구여성의전화가 가해자 유죄판결 후에, 이 판결 내용을 소식지와 홈페이지에 알렸다가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했다. 대구여성의전화는 이미 가해자가 유죄판결이 난 사건이고, 판결문 소개를 통해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한 것은 충분히 공익적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폭력 가해자들이 오히려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는 당시의 분위기는 어렵사리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한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막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가로막는 가해자들의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였다.

 

고소도 취하도 가해자의 뜻, 법정에서 죄인이 된 피해자들

 

  
2002년 11월 1일, KBS 노조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의 규탄시위
ⓒ KBS성폭력공대위

KBS 노조 간부의 성폭력 사건에서는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판단이 가해자가 제기한 명예훼손을 다루는 법정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피해자는 원고가 아닌 '피의자'가 되어 가해자의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진술해야만 했다.

피해자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고소를 제기할 수 없었는데, 성폭력 범죄는 '친고죄'로서 고소기간이 1년 밖에 되지 않아서 이미 고소기간이 지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해자가 제기할 수 있는 명예훼손의 공소시효는 5~7년으로 보다 길었다.

 

따라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성폭력 사실을 고소할 수 없는 데 반해, 가해자만이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를 고소할 수 있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피해자의 사생활과 명예를 보호한다는 성폭력 친고죄 조항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피해자의 권리행사를 제한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와 지원자들은 '피의자'의 입장에서 죄인처럼 심문을 받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피해 사실을 입증했다. 그러자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여긴 가해자는 명예훼손 역고소를 취하해 버렸다.

 

동국대 교수 성폭력 사건에서도 성폭력 가해자인 교수는 오히려 피해자와 성폭력 사실을 문제삼은 동료 여교수를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였다. 이에 2002년 7월 10일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또하나의문화 등 20여개 단체가 '성폭력 추방운동에 대한 명예훼손 역고소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25인의 공동변호인단을 꾸리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동료 여교수가 명예훼손 역고소에 대해서 무혐의 처분을 받자, KBS 노조 간부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해자인 교수가 자진해서 피해자에 대한 역고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렇듯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는 피해자를 오히려 죄인으로 법정에 서게 함으로써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법정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가 사실임을 입증하고 가해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자아가 붕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기껏 성폭력 피해가 사실임을 주장해도 가해자는 그저 명예훼손 역고소를 취하하면 그뿐이다. 피해자를 그토록 괴롭히며 '죄인'으로 법정에 세운 것에 대해서 가해자는 아무런 대가도, 처벌도 받지 않고 유유히 사라진다. 고소도 취하도 가해자의 뜻이며, 피해자는 허탈하게 상처뿐인 영광을 안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 공론화'의 공익성이 대법원에서 인정되다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 흐름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2005년 4월 29일 내려진 대법원 판결이었다.

 

명예훼손에 대한 형법조항(형법 제307조)은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한 것뿐만 아니라 사실을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한 것도 처벌하고 있다. 또한 비방의 목적으로 출판물 등을 통해서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가중처벌하고 있다(형법 제309조). 명예훼손죄는 예외조항을 가지는데 사실로서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는 위법하다고 보지 않는다(형법 제310조).

 

그동안 법원은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시킨 사안에 대해서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유죄판결하였다. 그러나 2005년 대법원은 대구여성의전화가 경북대 교수 성추행 사건을 소식지와 인터넷에 실명공개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사건은 1심과 2심에서 성폭력 사건 공론화한 것에 대해서 공익성이 인정되지 않아서 유죄판결이 난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했다 하더라도 "학내 성폭력의 근절을 위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달리 비방의 목적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대법원 2005.4.29. 선고, 2003도2137 판결). 이는 그동안 반성폭력운동이 주장했던 성폭력 공론화가 가진 사회적 의의 및 공익성이 비로소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었다.

 

이렇듯 성폭력 사건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의 공익성을 인정받은 것은 몇 년 동안의 지난한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성과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법정에 선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폭력상담지침서에는 피해자에게 가해자에게 명예훼손이나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하라는 조언이 있을 정도이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일단은 피해자에게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하고, 나중에 상황이 불리해지면 역고소를 취하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명예훼손 역고소는 여전히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가해자의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용석 의원이 해당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내용이 허위로 밝혀져서 오히려 무고죄가 인정된 판결은 매우 통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줄줄이 명예훼손 역고소를 당했던 2002년에 비하면, 가해자에게 모욕죄와 무고죄가 선고되는 지금은 격세지감을 느낀다. 여전히 가해자의 법정에서 용감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많은 피해자들을 응원하며, 이번 기회에 성폭력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가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은심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참여기획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출처 : 성폭력 당한 것도 억울한데, 내가 피의자라니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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