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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불처벌> 서평 #1: 성산업의 현재와 개정되어야 하는 처벌법

 

<불처벌> 서평 #1: 성산업의 현재와 개정되어야 하는 처벌법

 

 

<불처벌>이라는 책은 성매매 여성을 처벌하는 사회에 던지는 페미니즘 선언이라는 강력한 부제를 가지고 등장한다. 12명의 저자가 의기투합해 집필한 이 책은 시간순으로 구성으로 되어있다. 초반부에는 현실이, 중반부부터는 과거의 ‘선도, 교정’의 역사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후반부에는 이 모든 것의 자양분이자 재강화의 토대였던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다룬다. 이번 1편에서는 각 필진들의 핵심 주장을 요약하고, 추천할만한 포인트를 작성해보는 것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이때, 같은 키워드로 다른 내용을 전개한 필진들의 주장은 한꺼번에 모아 정리하는 방식으로 부족한 지면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채우고자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황유나님은 2015년 헌법재판소의 성판매 여성 처벌 합헌 결정 유지 사건에 대해 불처벌 입장을 피력해 온 여성단체들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한 것도 억울한 일이지만, 성매매 여성을 처벌함으로써 ‘건전한 성 풍속 및 선량한 성적 도의’를 파괴하는 성매매 산업을 축소할 수 있다는 생각의 인과관계를 잘못 설정한 것이 더욱 문제적이라고 제시한다. 성매매 여성을 처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 산업이 풍선효과로 날로 확장되기만 한 것에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여 거래 하는 행위의 수익성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성적 여성에 대한 편견에 갇혀 누락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만한 대목을 꼽아보자면, 최근 몇 년간 계속 주장되어온 노르딕 모델이 한국의 실정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논쟁 지점이다. 일대일 성매매와 거리형 성매매가 주류를 이룬데다 전체 인구의 0.02%만이 성매매 종사자인 북유럽의 상황과, 37억으로 추산되는 한국의 산업형 성매매는 개인의 수요차단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식품 위생법의 유흥 접객원 관련 조항이 아직도 남아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남성의 유흥을 위해 여성이 동원되고 있으며, 본 산업의 서비스 행위인 1차에 고용되는 사람은 2차를 가야한다는 것을 물어봐도 되는 존재가 되기에 비 성매매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김주희님은 성매매 처벌법(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 무엇을 처벌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전개한다. 성매매 처벌법은 성적 규범을 이탈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며, 반면 여성을 구매함으로써 남성성을 획득하거나 증명한다고 인정받는 집단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은 제기되어 오고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특히, 성매매 후기 사이트에서 신화화된 성적 서비스에 대한 환상은 남성들의 성구매를 부추기고 있을 뿐 아니라, 몸을 매개로 자원화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불공정 담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해내는 질적 자료가 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남성들은 장부에 기입되어 있어도 소환조사나 구속 수사를 받지 않고, 동시간대 여성들은 3배 이상 검거되어 벌금형을 선고받는 이 상황이 성매매 처벌법의 목적 조항인 ‘인권 침해 및 인신매매적 상황에서부터의 피해자 보호’를 실현하는 공권력의 모습일까. 또한, 현장에서 어디서부터 자발과 강요인지 종사자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음에도 인신매매적 성격이나 신체부자유한 상황 등과 같은 예외조항에서만 사법적이고 도덕적인 면죄부를 주려는 것은, 여성의 빈곤 탈출을 위한 적극적 생애 계획과 그 의지마저 국가가 용인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노혜진님은 성산업 종사의 계기를 단순히 사치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사회적 믿음에 균열을 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성산업과 공모하는 관련자들과 업계에 대한 분석을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의 상담사례를 통하여 제시한다. 여성전용 특화대출, 여신금융 등의 성매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 등으로 금융 자본이 성산업에 눈을 뜬 현실은 막대한 이윤이 나는 여성의 몸 그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일수라고 불리는 대부업 또한 법정 최고이자의 3배~6배 이상 웃도는 고리대임에도 국가의 적극적 제재가 없기에, 방 일수 등의 일상적 형태로 여성들에게 강권되고 있다. 업주에 의한 강간, 강제 추행 피해 등이나 성구매자에 의한 살인 미수 행위 등은 성매매 여성들이 매일 마주할 수도 있는 실제적 위협이다. 업주가 허위소득 신고를 위해서 근로 여성들에게 소득 신고를 해야 한다며 강요한 사례나, 구매자나 실장 등의 남성으로부터 가게 밖에서 ‘애인 대행’을 요구하는 등의 스토킹을 겪지만 자신이 처벌받을 것과 개인정보 유출 등의 피해를 예상하고 신고해야 하는 현실에서, 누가 이걸 신고할 수 있을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장다혜님은 윤락행위등방지법에서 현행 법률로 바뀐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과 의의를 강조하면서, 법의 도입 취지와 형식적 구조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긴장이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입법 당시 정부가 “성매매가 불법이라는 것을 재천명하고, 양자 관계로 보았던 성매매를 알선 행위가 존재하는 3자 관계로 재규정해냄으로써, 성산업의 규모를 줄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스스로 진단하였지만, 그 형식적 구조가 윤방법에서 진일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러한 위대한 도입 목표를 실천하는데 가로막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매매의 법적 정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금품이나 그 밖의 재산상의 이익을 수수하거나 그것을 약속하고, 성교 행위나 신체 일부나 도구를 이용한 유사 성교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인데 그 구조를 뜯어보면 성매수남에 대한 포커스는 사라지고 만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성 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은 2013년 형법 개정 전 음행매개죄의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와 일치하는 표현이고, ‘금품이나 재산 상의 이득을 얻는 자’라는 규정은 성매매에서의 위계적 질서를 부정하고 관련인을 모두 동등하게 처벌하는 결과로 미끄러진다. 특히, 법제도로 야기된 수사 상의 한계가 핵심인데, 특별법 초기와 달리 단속 수사반이 해체되면서, 수사관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여성들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검사가 약식 기소가 아닌 보호 관찰 명령으로 송치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피해자 보호 지원 센터 등으로 연계되지 않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 부분은 흥미롭다. 기존의 피해자 보호 지원 센터 및 자활센터도 교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상벌점제를 운영하여 벌점이 쌓이면 환경 미화를 담당해야 하거나 탈성매매할 자원이 제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심리적 부담감만을 안고 있다는 지적을 들은 적이 있어서다.

 

 백소윤님의 글은 성폭력의 피해자 통념과, 성매매에서는 성폭력이 일어날 수 없는 공간이라고 합의한 사회의 대전제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성폭력에 대한 신고를 하러갔더니 성매매에 대한 자백조서가 되었다는 상담 사례는 금전적 대가가 있으면 침범해도 되는 여성의 몸이라는 허구의 개념이 여성을 어떻게 위축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업주나 성구매 남성에 의한 폭행으로 전치 4주 이상의 부상을 입어도 대질심문을 시킨다거나 성폭력 장면에 대한 자세한 진술은 마치 포르노그래피를 연상시키기에 가이드라인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키운다. 특히, 성희롱이 중대한 산업 재해로 다루어지는 사회적 합의가 성매매 공간과 그 종사자에게만 예외로 적용된다는 것은 결국 사회의 견고한 성이중관념의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남승현 님의 글은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유주의 패러다임에 근거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속칭 ‘떡볶이 화대 사건’*에서 모두가 동등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대가가 모두에게 같은 의미일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자유주의적 입장이라며 실비아 페데리치와 마리아 미즈를 인용한다. 자연화된 전제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숙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그의 지적은 통쾌하다. 한편, 집단적 남성 성구매문화도 문제지만 이를 근절하려면 공급책부터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2013년 위헌 법률 심판 결정문은 성판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숨긴 대다수의 온정적 차별주의자의 말과도 일치한다. 특히, 신 변종 업소 등장으로 알 수 있는 다양한 성상품의 기획에서 핵심적으로 주조되는 성욕과 성문화는 오구라 도시마루와 우에노 치즈코의 파라마켓이나 ‘여성에게만 반응하는 남성적 욕망’ 등의 수사를 통해 여성이 성매매를 해야만 높은 수익성을 얻을 수 있는 현실을 잘 설명한다. 성매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산업이라고 해도, 그 형태나 운영방식은 과거와는 다르다는 질적 차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최별님의 글은 행위자 간의 위계성에 대한 성찰없는 구조로 된 처벌법이 집행자에게 피해자성을 근거로 ‘보호받을 만한 여성’을 선정할 권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여성 자신이 피해자가 되도록 인정받을만한 근거를 갖출 책임을 지게 했다고 제시한다. 그는, 2018년에 발족한 성착취반대여성인권 공동행동의 구호 또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며, “성매매는 성착취다”라는 구호는 성매매를 성적인 폭력의 집합체로만 규정하여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노동 시장의 열악함 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지운다고 말한다. 또, “성매매는 페이 강간이다”라는 구호는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성매매 여성 개인의 문제해결 능력을 무시하고, 성폭력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내모는 몰지각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여러 직군에서 성적 매력을 자본화하여 이를 통해 이윤을 벌어들이는데, 유독 성매매 여성에게만 도덕적 이중잣대를 재생산하는 표현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 성적인 여성을 질시하면서 가난이나 장애, 연령 등의 예외사항을 부착한 이들을 피해자로서 제한적으로 보호하려는 움직임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것에 지나지 않다.  동시에, 이는 생애 여러 불리한 조건을 뚫고 나가려는 여성들의 적극적 행위자성과 정동을 삭제하는 것이다. 현재의 성산업에 진입하는 이들은 국가 폭력과 성산업 내부 구조라는 이중적 거시적 맥락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피해자성을 중심으로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반성매매운동계와 노동 일반으로 옮겨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성노동론계 역시 법의 자유주의적 질서가 파 놓은 함정에 걸린 셈이다.

 

 민가영님은 기존의 10대 여성 청소년 성매매 담론이 그들을 무기력한 피해자로 두지 않고 주류사회와 적극적인 협상과 순응, 저항을 하는 정치적 주체로 바라봤지만, 이제는 비강압적 착취라는 권력의 작동방식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진단했다. 외면상 위협이나 협박이 없고, 스스로 협력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면 담지한 취약성으로 인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가해관계와 협력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이 용어는, 피해 청소년이 보상을 위해서 참거나 두려워서 회피하는 등의 심리 반응을 보인다고 제시하고 있다. 2010년 이후 등장한 신 빈곤은 과거의 가정 해체와는 달리 돌봄을 누군가에게 이양하지 않고 대책없이 부모가 사라지는 형태가 많아졌으며, 가정이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가정 밖에서 살아갈 정보와 지식, 기술이나 태도 등을 학습하지 못한 청소년이 집단적 공생을 위해 만든 가출팸에서, 아리랑치기나 조건 사기 등의 비행 행위는 그들의 생활비가 된다. 이때의 남성청소년 혹은 성인은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 젠더적 존재가 되기에 비공식 경제 시장의 행위자에서 빠지게 된다. 특히, 공감되면서도 안타까웠던 부분은 조건 사기나 알선 등에 적극적인 남자 청소년이 ‘안전 장치 없는 여성’인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새로운 가족적 유대감을 주는 가출팸의 대내외적 보호 울타리로 인식된다는 것이었다.

 

 유현미님은 시민성이 타인과의 연결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시작하기에 타인과의 구별짓기로 인해 오히려 연결성을 끊어낼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왜 젠더 폭력 피해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여성들도 구별짓기를 실현하고자 하는지 그 욕망을 읽어내고자 한다.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은 가부장제의 작동 원리 그 자체이기에 이를 위협하는 존재인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혐오는 일상화될 수 밖에 없으며, 여성혐오를 만난 여성이 자기 혐오를 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계급적 우월 의식 등이 뭉친 거친 발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다층적 맥락 속에서 수행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을 단순히 남성의 성적 욕망과 행복을 위해 여성의 신체와 노동 일반이 사용되는 성적 유도체화라는 언설은 페미니즘의 언어를 차용하여 현상을 납작하게 평가절하하기 위한 시도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이 단어의 고안은 여성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노동소외현상을 다루기 위한 것이지, 타인의 노동에 대한 단순 부정과 대응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노동 현장 일반에서 한쪽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많으면, 이에 따른 구성원 간 상호작용과 성 역할 기대가 폭증한다는 성역할 번짐론을 성매매 산업 현장과 연결시킨 것이 참신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공간에 여성적 성역할만이 가득할 때 여성이 성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성구매자 남성을 지우는데에 용이하다. 저자는  범죄학자가 고안해 낸 ‘중화의 기술’이라는 단어를 빌려, 여성의 몸을 담보로 이윤을 착취한 이웃들과 엉켜서 살아야 하는 데에 대한 공포감과 이로 인한 가상적 안전감을 확보하는 시도가 성매매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동력이 된다고 분석했다. 이 역시 직관적으로 동의가 가능한 부분이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콘텐츠기자단 '틈'의 원영님이 작성했습니다.>

 

 

 

* 2014년, 지적장애아동이 다수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나, 가해자들로부터 숙박과 떡볶이 등을 제공받은 것을 이유로 법원이 성매매로 판단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