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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생존자와 함께한 대담한 도전: 20주년 특집

드러나지 않는 친족 성폭력, 우리사회는 유죄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에 맞선 20년 - 친족 성폭력 처벌의 도화선이 된 1992년 사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성폭력에 맞선 2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본 기사는 [12년간 밤마다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 "벗어나고 싶었습니다...지켜주고 싶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4월 14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이제까지 살아 온 20년 세월보다 갇혀있는 7개월, 지금이 가장 마음이 편안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이제 더 이상 밤마다 짐승같은 인간에게 짓밟히지 않아도 되니까요…." - 충주의붓아버지 살해사건 피의자 김○○(남·이하 B)씨 2심 재판 최후진술 중에서


1992년 1월 17일 충주에서 젊은 남녀 대학생이 여학생의 의붓아버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죽은 피해자는 여학생을 9살 때부터 12년 동안 상습적으로 성폭행해온 성폭력 가해자였다.

졸지에 피의자가 된 김○○(여·이하 A)씨은 7살 때 재혼한 엄마의 남편, 즉 의붓아버지에 의해 9살 때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기 시작했고 12살 무렵부터 거의 매일 강간 피해를 입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이후까지 12년간, 인간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온갖 성폭력을 의붓아버지로부터 당했다고 한다.

성폭력 가해자였던 의붓아버지는 항상 쥐약과 식칼을 집에 상비해 두고, 가족들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린다'는 협박을 일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A의 엄마와 의붓오빠 두 명도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가해자의 끔찍한 구타와 살해 위협을 겪어야만 했다.

A는 집에서 떨어진 대학에 진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의붓아버지의 감시망에서 잠깐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캠퍼스에 다니던 B와 만나 서로 사랑의 마음을 키워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순수한 그의 사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를 조금씩 멀리하게 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B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끊임없이 요구하자, 눈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털어놓게 됐다고 한다.

처음 이야기를 들은 B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A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이라도 그녀를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A를 설득하여 의붓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 의붓아버지는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지검 총무과장이었기에,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건이 있던 1992년 1월 17일, B는 의붓아버지와 A가 있는 곳에 찾아가서 "이제 A를 그만 놓아주라"고 간청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오히려 "다 잡아 넣겠다, 죽여버리겠다"고 길길이 뛰는 의붓아버지의 파렴치한 모습에 격분하여 가해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1월 19일 존속살해 공모자로 구속됐다.

 

근친성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다

 

  
▲ 충주 근친성폭력 피해자 의붓아버지 살해 사건 기자회견 1992년 사건 이후 꾸려진 공동대책위가 기자회견을 하던 모습.
ⓒ 한국성폭력상담소
 

 

이 사건은 B의 아버지가 두 사람이 구속된 다음 날인 1월 20일,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면서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들어서게 됐다.

"내 아이가 살인을 했다… 이런 일을 저지른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의붓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왔고, 이를 말리려다 일어난 사건이다."  

B의 아버지가 너무나 힘들어하며 어렵게 쏟아낸 상담의 내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상담소는 우선 사건이 발생한 지역으로 가서 두 사람을 면회하고 A의 어머니를 카페에서 만나 4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 자행돼 온 의붓아버지의 가해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진상파악과 구명운동을 시작한다. 이 공동대책위원회는 곧 A와 B가 다니던 대학교 학생회와 전국대학 여학생회 그리고 56개 여성단체로 확대되었고 22명의 대규모 변호인단을 조직하여 이들의 무죄석방과 정당방위 논증을 위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매 재판마다 300~400명의 대학생들과 여성단체 사람들이 찾아와 방청석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찼고,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문밖에서 재판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재판정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매 순간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경악했다.  

재판을 끝내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호송차를 에워싸고 "○○아 힘내!, 우리가 지켜줄게" 소리쳐 응원하며 사람들은 흐느꼈다(B는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김영삼 대통령 취임시 1/2로 감형되었다. A는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존속살인사건의 집행유예 선고는 고등법원에서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시 사면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1년 동안 3심까지 재판이 진행되면서 언론의 집중적 관심을 받았고,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언급조차 기피했던 근친성폭력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실 근친성폭력의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1991년에 개소한 이후 1992년 사건 당시까지 1년 동안 접한 상담 사례의 30%가 어린이 성폭력사건이었고, 강간사건 중 근친강간이 거의 20%를 차지했다.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이 치정이라고?

 

  
▲ 사건 피의자들의 석방을 위한 대학생들의 집회 1992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린, 두 피의자 지원을 위한 대학생들의 집회 모습
ⓒ 한국성폭력상담소

 

그러나 법정과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양도 사실 즐긴 것은 아닌가? 새 애인이 생겨 변심한 것은 아닌가?'하는 식의 불륜사건으로 몰아갔고, 어린이 근친성폭력을 피해자가 성적 유희를 즐긴 것으로 간주하는 천박하고 비열한 성인식을 드러냈다.

1, 2심 재판 과정에서 어떤 검사는 A의 심문과정에서 "아버지가 그랬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질문하며, 성폭행이 아닌 상간일 가능성을 찾으려는 극도의 가해자 중심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B의 심문에서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고도 이런 여자를 계속 좋아할 수 있었나?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하다"며 우리 사회의 순결이데올로기를 주저없이 드러냈다. 폭력과 강간, 살해 위협 속에서 극도의 공포와 무기력에 시달린 또 한 명의 피해자였던 A의 엄마에 대한 비난도 쏟아졌다.

이렇듯 이 사건은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요인들에 의해 복잡한 논박이 오갔다. 재판 내내 공동대책위원회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함부로 지배, 통제할 수 있는 성적 대상이라는 환상을 가능하게 하는 남성중심적인 성인식이 이들을 살인으로 내몬 주범'이라고,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성적으로 더럽혀진 여자'로 명명하여 꽁꽁 숨어 지내게 만든 우리사회의 부도덕성이 공범'이라고 외쳤다. 이것은 피해자 여성의 관점에 입각한 새로운 법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도전이었다.

이러한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에 가득찬 법원의 판결은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친족성폭력을 강하게 처벌하고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은 성폭력을 둘러싼 왜곡된 통념과 남성중심적인 법, 제도와의 본격적인 싸움의 본격적인 첫 라운드였던 셈이다.

 

우리사회가 유죄이고, 그들은 무죄이다

 

 

  
▲ 근친성폭력 사건 이후 거세진 반성폭력 물결 1992년 당시 신촌 모처에서 열린 집회.
ⓒ 한국성폭력상담소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수많은 근친성폭력 피해자들이 상담소 문을 두드렸고, 그 내용 역시 충주에서 발생한 사건에 버금가는 피해들로 가득했다.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이러한 사례들을 객관적 통계자료로 제시하고, 이 같은 일들이 우리사회 일각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문제임을 알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근친성폭력 사건은 우리사회에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은 이들의 행위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왜 12년 동안이나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근친성폭력 피해자는 매순간 살해당하는 것에 준한다 할 수 있을 만큼, 현저한 불법적 공격과 침해를 연속적으로 당하는 절박한 상태에 놓인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매우 어린 나이부터, 외부에 노출되기 어려운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강도 높은 위협을 받으면서 성폭력을 당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매우 위축되어 있고, 정신적 공황으로 인해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A가 의붓아버지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인인 B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가해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에서, 가해자 본인에게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고, 정 안 되면 위협이라도 해서 막아보려는 자구책을 쓰게 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친족성폭력의 해법 마련, 한국사회에서 가능한가

지난 4월 10일, 미성년자인 친딸에게 수년간 성폭력을 일삼아 실형을 선고받은 40대에게 법원이 친권상실을 선고한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A씨 사건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성폭력특별법에는 친족성폭력 처벌 조항이 마련되고, 전국의 성폭력상담소가 160여개에 달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운영하는 쉼터인 열림터에는 여전히 근친성폭력피해여성의 입소 비율이 가장 높고, 언론에 보도되는 근친성폭력 사건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왜일까. 20년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이다.

성폭력은 법적처벌만으로는 근절되기 어려우며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근친성폭력은 그 중에서도 더욱 더 외부에 드러내기 쉽지 않은 문제 중 하나이다. 가족 내 성폭력은 절대로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덮어지거나 용서될 수 없다.

지난 20년간 본격적으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반성폭력운동에서, 여전히 근친성폭력은 커다란 화두이다. 친족성폭력사건을 다루는 법과 제도의 실효성을 재점검하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평등한 성문화 창출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글쓴이 최영애님은 현재 '여성인권을지원하는사람들' 대표이사이며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한국성폭력상담소 초대 소장을 지냈습니다. 사건과 관련된 추가적인 내용은 <성폭력뒤집기> 책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건 당사자 보호 차원에서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사건의 내용을 최소화 하여 적습니다.